한라산에 올랐다. 긴급히 휴가로 제주도에 온 도현이가 ‘내가 온 목적은 한라산 등반이야.’ 라고 하는 바람에 갔다 왔다. 그나마 짧은 코스인 1100도로를 타고 저 높이까지 차를 타고 올라가 6km 가량의 짧은 코스였지만 지옥과 선계를 왔다 갔다온 경험이 되었다.
역시나 비를 몰고 다니는 사나이 답게 도현이는 화창하던 제주에 비바람을 몰고 왔다. 도착한 날은 나쁘지 않아서 고기도 밖에서 구워먹었지만 한라산에 등반하기로 한 아침부터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1100도로를 타고 올라가는데 가시거리가 1m터도 안나오는 지옥같은 안개를 헤치고 올라가는 것은 약과 였다. 등반 입구에서 별일 없던 한라산은 발을 내딛은지 30분도 되지 않아서 비바람을 뿌리기 시작했다. 안경을 쓰는 나로서는 굉장히 괴로운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공인 체력 저질인 나에게 한라산 등반길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계단 하나 하나가 죽을 듯이 높았고 내 허벅지인지 내 다리인지도 모르게 올라갔다. 오직 앞서 올라가는 도현이의 뒷모습만 쫓아갔다. 그래도 의사랑 같이 올라가니 설마 죽진 않겠거니 하는 마음도 살짝 있기도 했고.
날씨가 좋지 않으니 뭐가 보일리가 없다. 3m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제주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 다는 뜻이겠다. 제주도에서 가장 높은 곳을 올라가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보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사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이 와중에도 우리의 김닥터는 나를 능수능락한게 채찍질을 하며(소아과답게) 어여차 하며 잘 끌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백록담 외벽이라 불리우는 이 코스의 마지막 부분까지 올라왔다. 다른 쪽 길로 가면 백록담까지 갈 수 있다고 하나 1100에서 출발하는 길은 현재 막힌 상태여서 외벽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는데…이런…자욱한 안개로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뷰포인트랍씨고 사진으로 보여지는데 뭐가 보이나, 외벽인지 뭔지 아예 모르는데. 그렇게 서있다가 애라이 사진이나 찍자하고 핸드폰을 여는 순간……
정말 영화같은 일이었다. 자욱한 안개가 갑자기 사라지고 웅장한 외벽이 보였다. 정말 놀랄 노자다. 우박도 내리던 날씨조차 개였다. 무슨 조화일까. 신비라는 단어로 설명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산신령이 있다면 내가 징징대면서도 여기까지 올라온 것에 대한 보답이라도 해준게 아닌가 싶다. 사진을 찍다가 이제 내려가볼까 하는 말과 동시에 다시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해 졌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난 한라산의 기운을 받고 힘!내어 다람쥐 굴러가듯 내려가는데 도현이가 퍼졌다. 그래서 가방도 들어주고 재촉도 하며 미끄러지듯 한라산에서 내려왔다.
나 혼자 계속 제주도에 있었다면 한라산에 갈리가 없었다.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구체적으로 계획도 새우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내가 제주도에 있어서 도현이가 휴가에 슬쩍 들렀고 그렇게 들른 도현이가 한라산에 오르니 나도 슬쩍 껴서 올라왔지만, 이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