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를 안다는 것

영상을 공부하면서 한 가지 불편한 점이라면 어떠한 영상을 보더라도 신기하게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소설 책을 나름 많이 읽어서 불편한 점이라면 어떠한 소설을 읽더라도 내용을 미리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소설 책을 나름 많이 읽어서 영상을 볼 때 불편한 점이라면 어떠한 영화를 봐도 내용을 미리 짐작할 수 있고 몇 분 정도에 갈등이 생기고 해결될지 예측 된다는 것이다.

영상을 공부하면서 책을 볼 때 불편한 점이라면 책을 보며 상상할 때 기술적 제약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상으로 옮기면 연출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을 관찰하다보면 인간관계의 끝은 어느 즈음에 있다는 것이 보인다. 어릴 땐 인간 행동을 관찰하는게 취미였는데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닿게 되고 부터는 단순 행동보다 패턴 파악을 관찰한다. 그냥 행동이 점, 선, 면으로 표현을 한다면 패턴은 일회성의 행동이 아닌 시간을 가지고 보이는 모습으로서 이야기를 가진 완결성을 지닌다. 삶은 그러한 패턴들이 집합들을 이루며 만들어진다.

집합들은 상황인식을 복잡하게 느끼게 한다. 비슷한 혹은 정말 똑같다고 느껴질만한 상황이지만 그것은 한 순간일뿐 인간으로서 살아온 시간의 발자취가 다르기에 방향이 다르다. 이 말은 주로 외국의 문화적 차이에 대해 비교할 때 내가 즐겨쓰는 말인데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도 유효하다. 사람은 개개인의 문화적 환경을 만들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 예축가능한 범위내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을 전제하게 되는 경우둘은 꽤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언이라는 개개인이 소유한 문화적 지식을 공유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보면 만남과 이별의 프로세서 처럼 말이다. ㅡ 나는 모든 이별한 사람들에게 영화 이터널 썬샤인을 추천한다. 만남과 이별사이에 있는 시간은 개개인들의 케바케지만 그 시간의 시작의 시간과 끝의 끝은 어쩜 그리도 비슷한가!

이렇게 똑똑이 짓을 하는 듯 글을 쓰지만, 사실 내 문제는 내가 풀기 어렵다. 최대한 객관화된 자신을 바라보고자 하지만 객관화된 내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내 시체를 바라보는 내 모습같은 것이다. 태초에 죽을 것을 알고 헤어짐이 있는 유한한 존재로서 숨쉬고 있어도 언제 무슨 일로 멈추게 될지 모르면서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나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난 내일엔 무관심에 가깝게 대하게 된다. 하는 말과 행동이 다른 모순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남들이 보는 내 모습을 종합하는게 더 쉽게 느껴진다.

아무튼 대다수의 시간은 바로 앞에 놓인 일에 묶여있다. 밥을 무엇을 먹을지, 술을 마실지, 언제 잘것인지 하는 등등 아이폰4를 가려면 약정승계남이 어떻게 될 수 있을까 라던지 말이다. 좀 더 앞을 보면, 취직을 해야하나, 돈은 얼마나 벌어야 하나, 결혼은 왜 자꾸 삶에 필요한 것 이라고 유부당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나 처럼 그냥 소소한 사회 인간들의 패턴에 대해 생각하고 허덕인다.

지금 난 눈에 보이는 패턴과 내가 가질 수 있는 특수성에 대해 고민한다. 선택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는 그러하다. 그나마 남들이 인증해준 안전한 라인을 따라 걸을 것인지, 한번 더 기대해 볼 것인지 졸린 새벽 세시 정각이다.

아이폰으로 침대에 누워 갑자기 쓰니 뭔가 뒤숭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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