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느릿느릿 거북이처럼 흘러가는 중이다

지난 2월 마지막 날 새벽에 전해들은 세 모녀의 자살은 굉장히 날 슬프게 하였다. 죄송하다며 월세를 봉투에 넣어두고 세상을 등진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면 할 수록 가슴은 찢어졌다.

이 이기적인 사회를 어찌 할 수 있을까.

내가 자주 하는 말 중에 “이명박 뽑은 것까지는 이해하는데 이명박 뽑고 박근혜를 뽑은 인간들은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갈 자격이 없다.” 는 것이다. 철저한 자신의 개인적 이익만을 대변하는 상위계층부터 ‘신’처럼 떠받드는 무지랭이들까지 그들에게 “자유” 라는 단어의 가치는 돈으로 귀결되는 천민자본주의 뿐이다.

우리가 용산참사와 쌍용차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내 이웃이기 때문이 아니라 언젠가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돈의 횡포로 부터 나를 지켜줘야 할 국가가 배신을 하고나면 기댈 곳은 있는가.

비정상적인 자본의 수직관계는 고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동경하는 이상으로서 삶의 목표가 주어지고 생의 도착점이 되어버린, 인간으로서의 의지와 추구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버린 너와 나의 사회속은 어두운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배와 같다. 아직 채 가지지도 못하고 피지도 못한 죽음이다. 분노하고 또 분노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눈물을 흘린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은 오늘도 흐른다.

이른바 진보와 보수의 의미조차 희미한 친구들에게 “좌빨”로 불리던 나의 의지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서 사라졌다. 51.6% 지지자들에게 묻는다. 너의 주머니 속에 들어간 돈은 아이들을 구해낼 만큼 충분한가. 외면하지 말고 당신이 던진 표에 너는 책임져라.

윤종신 – 좋니

 

한참동안 이 노래의 존재를 몰랐다. 차트에 역주행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뭐 윤종신 노래가? 왜?’ 하고 말았다. 월간 윤종신 초기 구독자였으면서도 그랬다. 좋은 노래들이 나와도 나만 좋고 말았었기 때문이라고, 바빠서 못들어 봤다고 핑계를 대본다.

그제 저녁에, 친구와, 친구가 하는 코인노래방에 가서 끝날 때즈음, 친구가 이 노래를 선택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곡을 가사를 보며 들어봤다.

 

찌질의 역사는 참으로 길다. 내가 고등학교 땐, 흔히 말하는 토이감성을 가진 친구들이 있었다. 난 성숙하지 못했었는지 그 감성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노래방에 가면 늘 시작할 때 누군가 누른 토이의 찌질한 가사는 눈물흘리는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더 이상 토이감성을 낼 수 없다는 유희열님의 말과 함께 그것들은 고전으로 사라지는가 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참으로 오랫만에 기승전찌질하다.

 

난 딱 알맞게 사랑하지 못한

뒤끝 있는 너의 예전 남자친구일 뿐

 

이런 찌질찌질한 생각으로 소주잔을 넘기며 아직도 징징대고 있을 첫 사랑의 뜨거움을 온몸으로 녹여내고 있을 어딘가의 누구에게, 좋은 눈물과 함께 안주거리가 될 노래.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