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와, 내년은 병신년.

노트북 수리를 기다리는 김에 오랜만에 잡설.

토요일 오전에 개인 트레이닝을 맛보고 왔다. 맛만 봤어도 힘들더라. 그리고 그날 저녁 더워서 빤스만 입고 잤다. 때 마침 비가 내리고 기온이 내려갔으나 나는 덮어야할 이불을 잠결에 찾지못하고 웅크리고 잤다. 그리고 일요일, 난 근육통과 함께 열을 수반한 채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신문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메르스의 대표적인 증상과 함께 말이다.

공포영화 혹은 소설의 기본 단계에는 ‘음산한 분위기’ 가 있다. 뭔가 일어날 것 만 같은 음악과 함께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뿌연 회색빛 이미지는 단골이다. 어디선가 왔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왜! 인지 모를, 아무 정보가 없다는 것은 사고하는 동물에게 주어진 원초적 두려움 이다.

메르스가 무섭다. 정확히는 뭔지 모를 것이 두렵다. 치료약도 없는 절망적(!) 상황을 수 많은 소설과 영화를 통해 ‘즐겼’었지만 그 모든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내가 질병을 옮기는지도 모른체 사람 가득한 영화관에 가서 쥐라기월드를 보고(개인적으로 볼만함, 2D로 모든 할인 방법을 동원한다면) 조카하고 놀아주고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고 수영장에 가서 너무나도 열심히 수영을 했다면!! 내가 바로 숙주라니!!

인정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는 문제들이 있다. 메르스는 다른 독감과 많이 다르지 않게 필요 이상의 공포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느 개인이나 사회가 광기로 물들던 이성을 잃는 행동들은 그냥 단순한 사람들의 의식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다. 특정 사회 현상으로 지칭되는 것을 간단하게 여기는 것도 사회에 대한 유기의식이다.

나는 메르스가 여름이 끝나기 전에 잠잠해 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봤다. 왜! 메르스가 이렇게 퍼진 건지는 알겠다. 한국에선 40%의 치사율에 닿지 않을 것이란 믿음도 생겼다. 이제는(?) 노력들도 하고 있는 걸 알았다. 하지만 오늘도 확진환자와 격리자들이 늘어간다. 추적이 가능했던 3차 감염자를 지나 지역사회 감염이라는 4차 감염자는 기정사실이라는 기사를 접할 수 있다. 환자를 숨긴 사실이 들어나고 활동 내역이 나오는데 하필 의사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간호사와 이송요원들이 걸렸다. 총칼을 든 전쟁이라면 나같은 땅개(ㅠㅠ)출신들이 뛰어나가고 다치면 의료진들이 뒤에서 봐주겠지만, 지금은 이 사태의 최전선에서 가장 고생중인 의료인들이다. 사태가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언제 어디서 환자와 맞닿을 지 모르는 가장 큰 불안감을 가져야 하는 직업이다. 누가 선뜻 그들에게 등을 떠밀 수 있을까.

홍콩에서 300여명이나 죽어나갔던 감기에 대해 듣고 본 이야기중 가장 겁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람이 사람을 꺼려한다는 것. 이웃을 멀리하고 사람을 경계하는 것,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곳 주변에 누가 확진자인지, 이웃이 사람이 아닌 <격리>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이미 시작 된듯 하다.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 하는 세상, 내 주변 친구 이웃을 무서워하는 하루하루를 지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까지 얼만큼의 시간이 지날까. 이렇게 까지 안가길 정말 바란다.

잠잠해지긴 할 텐데,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언제쯤 잠잠해 질런지는 점점 모르겠다. 손 잘씻고 마스크하고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려야지.

먹먹함에 가슴이 아프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40227215008269

가끔 신문 기사를 볼 때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우가 있다.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고통과 아픔이 지나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낸다.

누구에게나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거는 기회가 아닌 강요다. 세 모녀는 죽음을 강요당했고 몸부림치고 받아들였다. 마지막까지 남겼던 그 돈으로 병원에 갈 수도 있었고 밥을 먹을 수도 있었고 따뜻하게 어떻게든 하루라도 더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 수 없다 살 수 없다 살 수 없다 살 수 없다.

누구 말마따라 나이가 먹어서 그런가, 아픈 일들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