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생일

4월 20일은 히틀러의 생일이다.
네오나치들과 스킨헤드들의 축제날이다.
근대에 가장 화려하고 열정적이였던 독재자는 사후에도 이렇게 축하받고 있다.

아직도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가.


수백만명의 목숨위에 서 있었으며
그의 아래 만들어진 수많은 죄악은 아직도 현재에 남아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
예를 들면 살아남은 홀로코스터들은 팔레스타인을 향해 총을 갈겼다던지,
이리저리 남의 나라 전쟁에 쫓아다닌 미국은 빌딩에 비행기가 쳐박혔다던지,
러시아에 남아 있는 ‘고려인’과 그들의 등쳐먹은 ‘한국인’이라던지.
이 시대에 있는 모든 죄악이 그의 손에서 입에서 나왔을리는 전혀 없지만 핑계를 대자면 한없이 핑계를 댈 수도 있는 존재인 아돌프 히틀러.

그의 총칼과 독가스는 없어졌을지언정, 강력한 언론의 대중선동의 힘과 국가에 의한 국민은 어느새 돌고 돌아 우리 한국사회에도 남아있다. 난 히틀러의 생일을 계기삼아 다시 한번 그를 한없이 미화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와 레니 리펜슈탈에 대해 생각을 한다.

얼마전에 괴벨스에 대한 책이 나왔다.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1000p를 넘는 양에 3만원이 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이책은 여러가지로 많은 의미가 있다. 일단 괴벨스를 아는 사람은 그에게 천재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아깝지 않다는 것에 대해 공감하리라 믿는다. 그는 완벽한 나쁜 천재였으며, 우리는 그의 흔적을 대중문명이 전파된 모든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획기적인 발명품중 하나인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가장 나쁘게 이용한 사람이니깐 말이다. 특히나 우리 사회를 비춰볼때 그의 흔적은 절대적인 군부독재시절을 통해 비춰 볼 수도 있다. 또한 최근의 영화인 V For Vendetta에선 미디어매체를 가장 큰 악의 영향으로 꼽기도 했으니, 실로 그가 생각해내고 사용한 대중선동의 방법은 천재라 안할 수 없다.

의지의 승리 中 괴벨스

1934년에 만들어진 Triumph des Willens(의지의 승리)는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전당대회를 기록한, 레니 리펜슈탈에 의해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다. 후대에 영화기법에서 쓰이게 되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편집 기법들이 다양하게 들어간 이 기록 다큐멘터리는 선전영화로서의 최고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여러대의 카메라를 이용하여 같은 시간 다른 장면을 편집한다던지[요즘은 아주 그냥 없는 카메라 까지 만들어서 가상으로찍어대지만…다 여기서 배워간거다] 웅대하고 장엄한 행렬과 열성적인 연설. 맨 마지막으로 가면 어느 열성적인 교회에 있는 듯한착각도 느낄 수 있다. 또한 대한민국 군대의 교육용비디오에서도 볼수 있는 여러가지가 담겨 있다.
레니 리펜슈탈은 미디어 크리에이터로서 가져야 할 마인드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모든 예술적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녀 역시 천재 소리를 들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말과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핵폭탄을 만들진 않았지만 그 토대를 제공한 아인슈타인과 비교할만도 하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만큼 선전영화 제작에 있어서 순수한 크리에이터였는지는 고인이 된 그녀만이 정말로 알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그녀는 전후에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그녀의 반평생 넘게 지고가야 했던 문제였다. 그녀는 그 문제에 대해 자신의 제작동기에 대해 당당하였으나, 그녀의 필름 뒤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한세기를 살았다.”][한가지 더 덧붙이면 그녀의 다큐는 당나귀에서 중국과 이탈리아에게 인기 있는 자료다]

전쟁에서 졌기 때분에 승자의 기록 속 그는 무능력한 지도자였으며 멍청한 남자였다. 하지만 괴벨스의 눈과 그의 휘하의 수뇌부들은 그의 어떤 면을 보았을까 궁금하다. 만들어진 이미지속의 히틀러와 다른 면을 본 수뇌부는 그를 업신여기기도 하였으며 그의 말 한마디에 인생을 송두리채 가져다 주기도 하였으니 나로선 도통 알 방법이 없다.

오늘날 많은 그의 열성적이 지지자들이 가지고 있는 그의 모습은 단지 하겐크로이츠와 불확실한 세대에 대한 불안감을 향해 목적없는 찬양일 뿐인 것임을 어떻게 말해줘야 하나 싶다.[들리지 않겠지] 군부독재 시절과 박정희가 그리운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은 말이다.[들리지 않겠지]

어찌되었든. 지금은 고인이된 아돌프 히틀러의 생일을 맞이하여.
이미 살아있지 않은 자의 생일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음에.
끄적끄적……

입시 자살에 대한 짧은 생각

여느 때처럼 야후 뉴스를 보다가 아래 게시판 글을 보게 되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잘죽었다” 라고 차갑게 말하는 리플을 보고 나서 그만 흥분해 버렸다. 나도 분명 예전에 그들과 마찬가지로 왜죽었냐 냐악한 모습일바에는 죽는게 낫다고 자살에 대해 이야기 한적이 있다. 그렇기에 더욱더 가볍게 죽음을 말하는 사람에게 화가난다기보다는 안타까움이 컸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조금은 내가 성장했다기보다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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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글을 남기려다 어느 분의 글에 흥분하며 동시에 글을 쓰다보니 무척이나 길어지고 이 기사와는 조금 동떨어진 부분까지 건드리게 되더군요.

우리나라는 고교시절 전공에 대한 이해와 수업이 부족합니다. 돈잘벌기 위한 직업, 그것이 아닐까요. 의대에 가기 위해 공부하는 애들중에 ‘난 꼭 아픈 누군가를 고쳐주고 싶어’ 라는 생각을 가진 아이를 보면 만화같다는 생각이 드는 현실은 저뿐일까요. 내가 그 점수를 받았으니 가는 것이 현실이죠. 직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고 의욕도가 제로에 가까운 우리나라 교실입니다. 고교시절 혹은 그 이전부터 그것들을 개발하는 교육을 한다면 이런 안타까운 현실이 조금은 나아지리라 생각합니다. 무턱대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나는 점수보다 입시제도 또한 각각의 직업에 따른 개성있는 입시가 스스로의 하고 싶은 일, 전공을 스스로 선택하게 도와준다면 대학 또한 의미가 더 있지 않을까요.

고교생이 대학생이 되기전에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대학 세달만 다녀보라는 분 말씀처럼 그 분이 깨달은 그것을 왜 알려주지 않을까요. 힘든 경쟁속에 비인간적인 대우까지 감수해야하는 현실은 오늘부로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사회. 우리사회가 추구해야할 방향입니다. 좀 더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런말뿐으로는 변화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것을 안다면 고쳐야 할일만 남은 것이죠.

당장 내가 나갈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해도 내가 지금 살아가는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처럼 내 자식과 그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해야할 일입니다.

그리고 잘죽었다, 혹은 가볍게 말씀드리는 분께.

[안타까운 마음으로 왜 죽었냐는 분께 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왜 이런 시대가 오게 되었는지 그것이 현실이라고 인정하라는 분들.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당신같은 분들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전쟁.

누군가 누구의 것을 빼앗으려고 죽이려들죠. 과연 누가 누구의 것을 빼앗으려 하는걸까요. 정해진 인원과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하고 경쟁을 하는 그네들의 잘못입니까?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살아남았다. 죽은 놈이 병신이다. 전쟁후엔 그런 의식밖에 남아있지 않은 분인가요.

과연 이 시대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겪었던 것을 또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시켜야 직성이 풀리는건지. 한줄 글로 누군가의 죽음을 희롱하는 당신들 역시 피해자임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