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어딘가로 가셨다. 흔히들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과연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를 일이다. 코와 입이 솜으로 틀어막혀있다가 관에 들어가시고, 버스 아랫쪽 화물칸에 실리고, 난 그 위에 좌석에 앉아 간밤에 못잔 잠을 자고, 육신이 한병의 재와 가루로 간소해지신 것을 보았다. 난 사실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DJDOC의 Street life가 생각이 난다. “나를 거리에서 볼수 없는건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건 yo!”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아빠가 곡을 하다 눈물을 쏟다 탈진했다. 돌아가셨다는 전화의 말을 듣기 10분전, 시골에 뵈러간다며 버스시간표를 확인하셨었다고 한다. 호상이라고 해도 한발 늦는 다는 것은 더 큰 아쉬움이셨으리라. 난 머리가 좋다. 탈진해 쓰러진 사람을 가만히 눕혀두라고 팔다리 주무루라는 당황한듯한 사람들에게, 억지로 이르켜 새우고 방으로 옮겨서 눕지 못하게 했다. 벽에 기대라고 했다. 물을 세컵을 마시게 했다. 난 틀리지 않았으며 당황하지 않았을 뿐이고 해야할 일을 알고 했다. 단지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아버지 일이라는 것에 당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워서 정신못차리는 아빠 얼굴머리 맞에서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서 “난 나중에 절대로 안울꺼야.”라고 말해주었다. 난 못된 놈이다. 기억 못하길래 나중에 다시 또 말해주었다.
올해 연세가 93세 셨다. 참 오래 사신편이다. 70이상으론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100년을 더 살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각자 생의 길이를 가늠하는 기준이 있다. 지난 삶을 반추하며 삶이 괴로운 것인지 행복한 것인지가 그 기준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그러기에 매순간 바뀌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가 되고나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당장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르지만 한 순간이라도 더 살고 싶은 사람이 있다. 누구에게나 지금 현실이 영원하리라는 호사스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인명은 재천이다.
형이 그랬다. “벼농사 지어놓은 듯 하다.” 할아버지 장례식에 모인 일가를 보고 말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었고 그로부터 형제들이 있었으며 그들에게서의 자식들이 있고 또 그 자식들의 아이들이 있었다. 난 5살 무렵 조카가 생겼다. 아빠가 형제중에 가장 막내이자 이른바 늦둥이였다. 그리고 난 그 항렬의 마지막 종착점이다. 큰아버지의 큰 자식의 큰 자식이 이번에 수능을 봤다. 시험이 몇일 안남았는지라 장례식장엔 못왔다. 그 녀석이 나보다 결혼을 먼저 할 것 같다. 난 안할꺼 같다.
어제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김치를 담그는 엄마와 새벽 3시까지 배추 절인 것을 씻어냈다.
어 포스팅 재개했네;
오늘은 의대생 마도의 말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김치는 나트륨 과다섭취 1위 음식이야…”
늘 불규칙(__)
아니 이자식 장례식장에서 상복에 사진질을
넘했다;;
너무 했다는 것은
너가 그 날, 그런 일을, 했던 것을 너무 했다고 하는거야( -_)/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