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지가 끝났다

요즘들어 뒷머리가 심히 무거워져서 이것저것 귀찮음이 꽃피는데.
그 와중에서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신경쓰던 일은 아니지만서도 중요하긴 중요한 일이였나보다.

나에게 세상을 편하기 사는 법은 기다리는 일이다. 무엇을 기다리며 그것이 끝날때까지 다른 일들을 해나가는게 편하다. 이른바 핑계거리가 있으면 좋다고 해야하나. 군대를 핑계로, 여행을 핑계로, 과제를 핑계로 시간을 쏟아 붓는다는건 꽤나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핑계거리가 다 끝나고 나서는 서둘러 다시 핑계거리를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그 핑계거리는 언젠가는 끝나는 일이고 또 다시 핑계거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 또한 귀찮은 일이기에 스스로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핑계거리가 때로는 남들에게 사는 목적일 때가 있다. 내 삶의 목적도 누군가의 핑계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삶이란 것을 딱히 두고 누군가와 견준다는 것만큼 어리석은게 없는게 아닐까. 처음으로 선생이라는 단어를 알고 나서부터 내 삶의 선생을 찾아다녔다. 내가 맹목적으로 따를만한 사람을 찾아왔고 아직도 찾고 있다. 하지만 난 아직까지 한번도 찾은 적이 없다. 그렇기에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배움의 흔적은 없다. 누군가와 전혀 다른 존재로서 존재하고 싶다는 것은 누군가와 한치의 틀림도 없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것과 같은 거다. 생은 유한한것이고 동시대에 존재하더라도 언젠가의 시대엔 나 홀로 존재 할 수 있는 일이테니깐.

내 나이 20대. 개성이라는 단어는 이미 없다. 잊었다. 잃어버렸다.

이쯤 되면 감정의 소비의 확장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나뉘게 된다. 나뉘는 기준은 스스로의 만족감보다는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이라고 말한다.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에 대해 정의를 하자면 친사회적인 것과 반사회적인 행동으로표출되는 감정을 말하겠다. 사회의 친사회적인 부분은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누군가와 대화와 만남을 통해서 서로를 아껴주고보듬어주며 외롭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고 반사회적인 부분은 “나는 나혼자로서도 잘 살수 있다. 외로움또한 내가 사랑하는 부분이며그 것으로도 충분하다.” 라는 것이다.

반사회적이라는 말에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에게 딱히 해줄 말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반사회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친사회적인 대표적인 단어로서는 “가족, 친구, 사랑” 등이 있겠고 반사회적인 대표적인 단어는 “나, 혼자, “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만남을 가지고 감정의 소비를 한다는 것은 사회를 가진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ひきこもり(한국표현식으론 은둔형 폐인..)라고 해도 요즘 세상엔 Digital ひきこもり라고 해서 인터넷이라도 하고 직접적인 대화는 아니더라도 문자와 활자와 여러사람들의 의견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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